[박규리] 치자꽃 편지/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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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편지/박규리
스님!
어느덧 상강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도량석 치는데, 등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더니 코끝이 차가워지더이다. 벌써 겨울이 왔나봅니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습니다. 저도 새봄이 오면 드디어 스님이 됩니다. 어제부터 영등(明燈)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상명등 스님은 키가 저보다 한 뼘이나 적은데다가 몸까지 약해 걱정입니다. 몸도 몸이지만 요즘은 아마 마음이 많이 아픈가봅니다. 새벽예불 모시는데 오늘따라 등꽃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입니다. 저는 못 본 척했지만 왠지 제 가슴도 울적해졌습니다. 법당을 나온 상명등 스님은 미안했는지, 저는 그만 마을로 돌아갈까봐요 하며 저물듯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만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마음은 아닙니다. 물빛 등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서 괜스레 그래 본 것뿐입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서울 처사님 때문에 저러실까도 싶지만, 꼭이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상명등 스님은 왜 슬퍼하는지요. 왜 저에게도 늘 가슴 먹먹한 슬픔이 깊이 또아리 틀고만 있는지요. 이 쓸쓸한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냥 꾹 참고 견딥니다. 견디다보면, 견디다보면, 그래요 스님은 그러셨지요. 무엇이든 다 견딜 수 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어디든 다 건널 수 있다고. 스님! 저는 지금 어느 망망한 생사 바다를 헤매고 있는지요. 아니, 어느 외로운 바닷길에 한송이 파도로 꽃피어 흐르는지요. 포로롱, 갑자기 새 한마리 제 책상 위로 날아듭니다. 푸득이는 날개 속에서 미칠 듯 그리운 스님의 치자꽃 향기가 눈부시게 쏟아집니다. 아, 그날 스님과 함께 마셨던 차 향기가 제 몸 속속들이 스며 흩날립니다.... 이제 그만 공양간에 채공* 살러 가야 합니다. 새봄에 무사히 스님이 되면, 그때 다시 소식 여쭙겠습니다. 참 보내주신 약 덕분에 무릎관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요즘에는 하루에 오백 배씩밖에 안 드리거든요. 걱정 마셔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는 스님 속으로만 흐르고 흘러갑니다. 홀로 가는 이 두려운 바닷길도 늘 그곳에 닿아 있어 저는 울지 않습니다.
법체 보존하소서.
*채공(菜供):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일.
- 박규리,『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스님!
어느덧 상강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도량석 치는데, 등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더니 코끝이 차가워지더이다. 벌써 겨울이 왔나봅니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습니다. 저도 새봄이 오면 드디어 스님이 됩니다. 어제부터 영등(明燈)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상명등 스님은 키가 저보다 한 뼘이나 적은데다가 몸까지 약해 걱정입니다. 몸도 몸이지만 요즘은 아마 마음이 많이 아픈가봅니다. 새벽예불 모시는데 오늘따라 등꽃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입니다. 저는 못 본 척했지만 왠지 제 가슴도 울적해졌습니다. 법당을 나온 상명등 스님은 미안했는지, 저는 그만 마을로 돌아갈까봐요 하며 저물듯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만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마음은 아닙니다. 물빛 등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서 괜스레 그래 본 것뿐입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서울 처사님 때문에 저러실까도 싶지만, 꼭이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상명등 스님은 왜 슬퍼하는지요. 왜 저에게도 늘 가슴 먹먹한 슬픔이 깊이 또아리 틀고만 있는지요. 이 쓸쓸한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냥 꾹 참고 견딥니다. 견디다보면, 견디다보면, 그래요 스님은 그러셨지요. 무엇이든 다 견딜 수 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어디든 다 건널 수 있다고. 스님! 저는 지금 어느 망망한 생사 바다를 헤매고 있는지요. 아니, 어느 외로운 바닷길에 한송이 파도로 꽃피어 흐르는지요. 포로롱, 갑자기 새 한마리 제 책상 위로 날아듭니다. 푸득이는 날개 속에서 미칠 듯 그리운 스님의 치자꽃 향기가 눈부시게 쏟아집니다. 아, 그날 스님과 함께 마셨던 차 향기가 제 몸 속속들이 스며 흩날립니다.... 이제 그만 공양간에 채공* 살러 가야 합니다. 새봄에 무사히 스님이 되면, 그때 다시 소식 여쭙겠습니다. 참 보내주신 약 덕분에 무릎관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요즘에는 하루에 오백 배씩밖에 안 드리거든요. 걱정 마셔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는 스님 속으로만 흐르고 흘러갑니다. 홀로 가는 이 두려운 바닷길도 늘 그곳에 닿아 있어 저는 울지 않습니다.
법체 보존하소서.
*채공(菜供):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일.
- 박규리,『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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