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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영숙이/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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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9회 작성일 2025-04-14 15:41: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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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이/문성해

나를 거쳐간 이름 중에는 유독 영숙이가 많다
중학교때 간질을 앓던
내 의자를 붙들고 안 넘어가려 애를 쓰던 내 짝 영숙이와
고등학교 때 담을 같이 쓰던 이웃집 영숙이와
그 애 집에 놀러갔다 영숙이 몰래 내 머리를 빗겨주던 그 영숙이 오빠와
결혼해서는 죽어라 일만 하다 어느 날 불쑥 절에 들어간 영숙이와
이즈음은 김포에서 내게로 두 시간이나 차를 타고 와서는 시를 배우고 가는
혈색이 안 좋은 나더러 사슴피를 마셔보라는 사슴 목장 주인인 영숙이도 있다

영숙이들은
서늘한 눈매와 다부진 입꼬리가 어딘가 닮아 있고
어느 땐가는 이들이 한 인물들 같아
내 과거를 다 안다며 불쑥불쑥 증거를 들이밀 것 같고
나는 앞으로 그 이름 앞에서는 정직해져야만 할 것 같고
한결같아야만 할 것 같고
앞으로 두어 명의 영숙이면 이번 생도 끝물이란 절망에
낯선 이들을 알기조차 꺼려진다

이 밤 영숙이는 또 어떤 이름과 밤을 나누는가
성도 얼굴도 다른 그이들이
몸에 영숙이를 담고 와서
내게 웃음과 주름을 주고 갔음을 생각하는 밤
나는 살아 영숙이와 나눈 끼니 수와
같이 보낸 밤의 수를 헤아려본다
그리고 먼 은하수 물결처럼 흘러갔을 영숙이들과
이 땅에서 내가 끝내는 못 만나고 갈 수많은 영숙이들도 생각한다

-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학동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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