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김근태/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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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도종환
김근태가 참혹한 고문의 날들을 빠져나왔을 때
살아나와 왼팔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을 때 김근태가
한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을 때
나는 내 시의 언어로 그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주저하였다
그의 영가(靈駕) 옆에서
잊었던 혁명가요 몇소절을 부르다 돌아오는 길
눈발이 몰아쳐 국밥집을 찾아들어갔다
영하의 날씨처럼 찬 소주를 털어넣으며
김근태가 없는 여백을 헐렁한 이야기로 채웠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바다 위에서 최후까지
우리를 끌고 가야 할 명료한 선장인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고 그가 사용하는 동사가 어눌하며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우리는 불만이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에 예민한 살과 뼈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칠성판 위에 알몸으로 꽁꽁 묶어놓고
전기로 지져대던 이십여일의 낮과 밤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항복을 강요하던 날들을
뼈를 부러뜨리고
저항하는 조직과
민주주의의 실핏줄을 짓이기던 가을밤을
남영동 그 죽음의 방을
구둣발을 붙잡고 짐승처럼
살려달라고 매달려야 했던 피맺힌 목청을
창문도 창틀을 부여잡고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 외딴곳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문을 참다 발뒤꿈치가 벗겨져 피가 흐르고
검푸르게 살들이 죽던 순간들을 증언하지 않는다면
시는 무엇을 노래한단 말인가
이렇게 처절하게 한 시대를 살아내다
늘 다니던 곳에서도 길을 잃고 집 근처에서도 길을 묻다
마른 옥수숫대처럼 스러져간 영혼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이겼어도 이길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은 시대를
한 생애를 다 던져도 역류하기만 하는 시대의 격랑을
김근태를
김근태의 필생의 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있으랴
이렇게 쓰러진 김근태를 보고도
내 시가 흐느끼지 않는다면
* 27~28행은 빠블로 네루다의 시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인용.
- 『사월 바다』(창비, 2016)
김근태가 참혹한 고문의 날들을 빠져나왔을 때
살아나와 왼팔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을 때 김근태가
한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을 때
나는 내 시의 언어로 그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주저하였다
그의 영가(靈駕) 옆에서
잊었던 혁명가요 몇소절을 부르다 돌아오는 길
눈발이 몰아쳐 국밥집을 찾아들어갔다
영하의 날씨처럼 찬 소주를 털어넣으며
김근태가 없는 여백을 헐렁한 이야기로 채웠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바다 위에서 최후까지
우리를 끌고 가야 할 명료한 선장인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고 그가 사용하는 동사가 어눌하며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우리는 불만이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에 예민한 살과 뼈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칠성판 위에 알몸으로 꽁꽁 묶어놓고
전기로 지져대던 이십여일의 낮과 밤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항복을 강요하던 날들을
뼈를 부러뜨리고
저항하는 조직과
민주주의의 실핏줄을 짓이기던 가을밤을
남영동 그 죽음의 방을
구둣발을 붙잡고 짐승처럼
살려달라고 매달려야 했던 피맺힌 목청을
창문도 창틀을 부여잡고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 외딴곳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문을 참다 발뒤꿈치가 벗겨져 피가 흐르고
검푸르게 살들이 죽던 순간들을 증언하지 않는다면
시는 무엇을 노래한단 말인가
이렇게 처절하게 한 시대를 살아내다
늘 다니던 곳에서도 길을 잃고 집 근처에서도 길을 묻다
마른 옥수숫대처럼 스러져간 영혼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이겼어도 이길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은 시대를
한 생애를 다 던져도 역류하기만 하는 시대의 격랑을
김근태를
김근태의 필생의 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있으랴
이렇게 쓰러진 김근태를 보고도
내 시가 흐느끼지 않는다면
* 27~28행은 빠블로 네루다의 시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인용.
- 『사월 바다』(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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