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포도밭처럼/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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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처럼/나희덕
저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살고 싶었다
산등성이 아래 몸을 구부려 낮게 낮게 엎드려서 살고 싶었다
숨은 듯 숨지는 않은 듯
세상 밖에서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다
입속에 남은 단 한마디 포도씨처럼 묻고
끝내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둥근 몸을 굴려 어디에 처박히고 싶은 꿈
내게 있었다, 몇 장의 잎새 뒤에서
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의 술틀에 던져진 포도알이었는지 모른다 채 익기도 전에 으깨어져 붉은 즙액이 되어 버린, 너무 많은 말들을 입속 가득 머금고 울컥거리는, 나는 어느새 둥근 몸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포도가 아닌 다른 몸이 되어 절벅거리며,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퍼져가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야트막한 포도밭의 평화,
아직 내 몸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아
사라진 손으로 사라진 몸을 더듬어 본다
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던 것처럼
-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저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살고 싶었다
산등성이 아래 몸을 구부려 낮게 낮게 엎드려서 살고 싶었다
숨은 듯 숨지는 않은 듯
세상 밖에서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다
입속에 남은 단 한마디 포도씨처럼 묻고
끝내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둥근 몸을 굴려 어디에 처박히고 싶은 꿈
내게 있었다, 몇 장의 잎새 뒤에서
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의 술틀에 던져진 포도알이었는지 모른다 채 익기도 전에 으깨어져 붉은 즙액이 되어 버린, 너무 많은 말들을 입속 가득 머금고 울컥거리는, 나는 어느새 둥근 몸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포도가 아닌 다른 몸이 되어 절벅거리며,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퍼져가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야트막한 포도밭의 평화,
아직 내 몸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아
사라진 손으로 사라진 몸을 더듬어 본다
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던 것처럼
-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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