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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그의 사진/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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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회 작성일 2025-05-20 19:13:5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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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나희덕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마르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실은
남아 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사진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사진을 보며 거실에 들어서는 날들,
그 고요 속에서
겨울 열매처럼 뒤늦게 익어가는 것도 있으니
평화는 그의 사진과 함께 늙어간다
모든 파열음을 흡수한 사각의 진공 속에서
그는 아직 살고 있는가
마른 잠자리처럼 액자 속에 채집된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그러나
파도 소리 같은 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듯 웃고 있지만
액자 위에는 어느새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볕이 환하게 드는 아침에는 미움도
연민도 아닌 손으로 사진을 닦기도 한다
먼지가 덮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걸레가 닦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 나희덕,『야생 사과』(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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