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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우산/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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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회 작성일 2025-05-20 18:02:4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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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나희덕

그날까지 나의 우산은 질기고 질긴 것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발기인대회,
마치 앞날의 선명한 대결을 예고하듯
빗줄기 길게 지나가고
사이사이 돋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
소나기 내리칠 때이다.
어깨에 어깨 걸었던 우리들 위로
우산이 하나둘 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더욱 극성스러워지고
내 한 몸 가리기에 급급하다 보면
언제든 떠나갈 준비가 된 어깨였다, 우산이었다.
그러나 온몸으로 당당하게 비를 맞고 계신 선생님,
팔년 전 내가 나의 제자들만 했던 시절
나의 국어선생님이셨던 그분이
이제는 단상에서 발기문을 읽고 계셨다.

검은 두루마기 빗물에 더욱 검어지고
전교조 발기문을 교과서 삼아
국어교사가 된 나를 다시 가르치시는 음성,
그 음성이 빗발보다 더 거세게
햇살보다 더 뜨겁게 나의 우산에 내리꽂히던 날,
비로소 나의 우산이 무엇이었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 한 몸이나 가리우던 녹슨 내 우산,
약한 우산을 찌르기도 했던 가시 돋친 내 우산
부러뜨려도 부러뜨려도 다시 팽팽해지던
그 무겁던 우산을 접어 땅에 내려놓으니
구름보다 먼저 두려움이 가시고
그날 파랗게 돋아오는 하늘 끝이 보였다.

- 『뿌리에게』(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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