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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종소리에 대하여/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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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회 작성일 2025-05-20 17:58:4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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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에 대하여/나희덕

1
밥 먹을 때는 왜 세 번 치지?
밥-먹-어-셋 아니가.

그럼 손님 왔을 때는 왜 네 번이야?
어-서-옵-쇼-해서지.
아니면 또-오-십-쇼-해서든.

떡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잘-보-여-라-이거야, 알겠어?

2
고아원 뒷산 개울가에서 우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매일 아침 얼음조각으로 얼굴을 부벼 씻고 어렸던 우리는 형들의 세숫물을 길러 다녔다 그러다가도 식당에서 식사종이 울리면 대야를 던져두고 마악 뛰어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듯이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은혜로우신…… 합창기도가 끝나자마자 숟가락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칠십 개가 넘는 그 소리는 칠십 개가 넘는 종소리가 되어 식당과 우리의 눈동자와 가슴을 끝없이 울렸다 밥 먹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느껴지는 배고픔을 위하여

언제나 우리의 배고픔을 종은 침묵한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무겁고 녹이 슨, 종을 몰래 팔아먹었다 종은 땅바닥에 엎드려 끌려갔고, 이상하다 엿은 배부르지 않고 우리의 뱃속에는 이미 종이 달려 있으니

우리의 배고픔을 우리는 침묵한다 개울가에서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것은 식당에서 울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우리가 긷던 물 속에서, 봄의 습기가 오르는 산골짜기로부터 우리도 알 수 없도록 흘러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희덕, 『뿌리에게』(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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