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밭에서/함민복 > 하

도라지밭에서/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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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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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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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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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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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린 낯빛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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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
폭폭소리 사방에 들려오는 거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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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