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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안개의 끝/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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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7회 작성일 2025-04-12 18:53: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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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끝/황동규

눈 뜨자 창 둘을 무겁게 메운 안개
대충 옷 걸치고 민박집을 나선다.
세상이 안개 한 덩이,
뵈지 않는 바다의 웅얼거림이
지난밤 가로등에 언뜻 비친 방파제로 길을 내준다.

깊은 안개 속을 걸으면
무언가 앞서 가는 게 없어 좋지.
발 내디딜 때
생각이나 생각의 부스러기 같은 게 밟히지 않는다.
양편에서 숨죽이고 느낌 주고받는 물소리
방파제를 완만하게 굽혀준다.
안개가 나를 받아들이는군.

잠깐, 소리가 달라져 걸음 멈추자
바로 앞에서 길이 끊기고
콘크리트 네발이들이 허물어지고
바다가 가벼운 신음을 내고 있다.
건너뛸까, 몇 번 눈 귀 대중하다.
목소리 바꾼 바다의 마음을 사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 하늘이 점차 환해지며
배들의 머리꼭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배에서 생선 상자 내리는 사람들의 어깨가 보이고
달려가는 흰둥이가 보이고
안개가 너울대고
길바닥이 보인다.
안 보이던 바닥이 보이면 다 산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높은 생선 짐 지고 요령 있게 굴러가는 자전거서껀
너울너울 춤추다 슬쩍 춤 걷는 안개서껀 사는 거라면
다 산 삶도 잠시 더 걸치고 가보자.

-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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