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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하] 대정 고을 수선화/허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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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9회 작성일 2025-04-12 18:49: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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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 고을 수선화/허만하

 고운 살결은 얼음에 데일 수 있다. 수선화 꽃잎은 그것을 알고도 한겨울에 깨끗한 입술을 열고 대정 고을 흙담 자락에서 호젓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버석거리는 흰 눈 두께를 뚫고 밀어올리는 초록색 꽃대 끝에 샛노란 중심과 순백의 꽃잎을 터트리는 맑은 정신의 힘.

 아홉 해 유배의 외로움을 혼자서 달래었던 황금의 잔. 눈부신 잔이 담은 정갈한 에스프리를 두 손으로 떠받치는 은백색 꽃잎. 남제주 검은 흙에서 태어난 수선화를 황금은대 黃金銀臺라 부르는 아름다운 은유. 하나의 은유를 위하여 시인은 태어난다. 한라산 이마를 번득이는 적설이 덮는 무렵 어리목 눈길 부는 바람 얼어붙는 때 가려 너는 피어나고 우리는 왔다.

 한겨울 검은 들판에 피어난 수선화 군락은 멀리 산방산을 업고 스스로 겨울 풍경의 한정된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을 알고 있다. 꽃을 꺾지 못하는 여린 소매에 묻어난 진한 야생의 향기. 수선화는 몇 만 년 전부터 이곳에 불었던 매서운 바람을 눈이 시린 빛깔과 몸짓으로 증언하고 있다. 용두머리 앞바다 맑은 코발트색 물빛이 묻어 있는 한겨울 바람 소리.

 몇 년 만인가. 모슬포 포구에서 바라보는 산방산 벼랑의 그윽한 눈부심. 한 올 더러운 햇살 묻히지 않는 벼랑의 결. 이곳에도 한때 서늘한 빙하라도 있었던가. 추사의 잔잔한 눈길처럼 맑은 기다림이 배어 있는 높이. 그 정갈한 산자락을 펼치는 들판을 찾아 고요한 노을처럼 번지고 있는 야생의 수선화, 어느덧 우리들 가슴 안에 뿌리내린 싱그러운 대정 고을 수선화.

-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솔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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