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저울 위에 놓인 바나나/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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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 위에 놓인 바나나/황지우
보라매병원 입구의 과일 상점들;
먼저 문병 받는 과일들은 제각각의 색깔들로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을 중환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뇌일혈로 떨어진 朴선생님은 입 벌리고 멍하게,
곧 문상객이 될 옛 동지들을 바라만 보고 계셨다
때로 육체는 생의 格을 무참하게 회수해가버린다
일생 동안 쌓은 것을 한순간에 까먹고 있으니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한 유물론자는 말했고
"화순에 토종닭 드시러 가셔야죠"라고 나는 말했다
선생은 뭔가 알아들었는지 우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멎어버린 자연 저편에 손을 넣어 나는 저린 손을 잡아드렸다
그것이 살짝 곰지락거렸다
병원을 나서자 보라매공원 일대에 걸친 저녁노을,
과일상의 과일들을 색색으로 熱 받게 하고, 저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손 같은
바나나가 그 무게를 시간으로 표시하고 있다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보라매병원 입구의 과일 상점들;
먼저 문병 받는 과일들은 제각각의 색깔들로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을 중환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뇌일혈로 떨어진 朴선생님은 입 벌리고 멍하게,
곧 문상객이 될 옛 동지들을 바라만 보고 계셨다
때로 육체는 생의 格을 무참하게 회수해가버린다
일생 동안 쌓은 것을 한순간에 까먹고 있으니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한 유물론자는 말했고
"화순에 토종닭 드시러 가셔야죠"라고 나는 말했다
선생은 뭔가 알아들었는지 우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멎어버린 자연 저편에 손을 넣어 나는 저린 손을 잡아드렸다
그것이 살짝 곰지락거렸다
병원을 나서자 보라매공원 일대에 걸친 저녁노을,
과일상의 과일들을 색색으로 熱 받게 하고, 저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손 같은
바나나가 그 무게를 시간으로 표시하고 있다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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