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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호루라기/최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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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0회 작성일 2025-04-20 20:38: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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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라기/최영철

아이들 뜀박질이 앞장서고 우렁찬 구령이 뒤따르고
호룩호룩 추임새에 펑펑 터지던 환호성들
호루라기 이제 싱그러운 가슴팍이 아니라
늙고 병든 저 할머니 머리맡에 걸려 있네
좋은 시절 다 보낸 빈털터리
할아버지 발치에 놓여 있네
호루라기 소리 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때 있었지
얼굴 닦는둥 마는둥 밥숟갈 어서 놓고
이빨 닦는둥 마는둥 한달음에 달려 나간 때 있었지
시퍼런 청춘을 목에 걸고 힘차게 불어제끼면
먼 산이 일렬횡대로 뛰어오고
졸고 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지
이제 호루라기 달려나가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해 기우는 저녁으로 가기 위해 있네
가장 첫 자리 새벽녘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오는 게 아니라
엉금엉금 기어가는 해소천식으로 일어나기 위해 있네
게으름 피고 늘어졌던 것들
일제히 불러일으키며 오는 게 아니라
뒷전으로 아래로 슬슬 몸을 빼기 위해 있네
호루라기 이제 설레는 아이들의 가슴에 있지 않고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네
자식 가고 영감 할멈 먼저 가고 덩그러니 남은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네

-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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