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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작법/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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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1회 작성일 2025-04-20 19:52: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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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법(詩作法)/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옅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든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 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터 시작하는 데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의자의 위치만 바꿔놓으면
하루에도 해 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없는 걸까
시는 시인의 땅에서 바람을 향기롭게 하고
시인은 오직 시를 위해서만 몸을 굽힐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을 받아쓰는 서기(書記)가 되기 위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중노동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일생 동안 시 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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