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고/최영숙 > 차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793
어제
861
최대
3,544
전체
298,540
  • H
  • HOME

 

[최영숙] 파리고/최영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14회 작성일 2025-04-14 17:06:17 댓글 0

본문

파리고(考)/최영숙

1
문제는 파리 한마리다
나는 폼이 영락없는 쉬파리다
어디에도 내려앉지 않으면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게 일정한 공간을 비행하는
놈은 나를 비웃는 듯하다
책상이든 유리창이든 앉기만 해라,
노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기우뚱, 헛손질하는 반원의 경계선에
절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않는다
그게 쉬파리다 끈질기다
끈질기게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단어의 순열조합 바로 그 쉬파리 한마리
그것이 문제이다 가을똥이다
쉬파리가 점 찍어놓은 전등갓의
흔적이다 그 배후이다
이제 문제는 파리 한마리가 아니고 쉬파리도 아니고
놈과 나 사이의 팽팽한 거리 그것이다
나와 나 사이의 시간이다
그걸 놈은 알고 있다 잠잠히 있기도 한다
반성의 여유를 주는 것이다
여름 한낮 물을 끼얹는 정적 속에서
겹눈인 놈의 망막에 비칠 내 모습이란
팔다리가 각각 허공을 휘젓는
무간지옥이 따로 없으리라
이래서야 시가 되겠나, 꿈이 되겠나

2
​오, 그리하여 내가 너를 보았으니
사족처럼 긴 날들이여 꿈틀꿈틀 기어가는
애벌레의 투명함이 탁, 터지는 살갗
날개를 달았구나 눈먼 사랑을 낳았겠구나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사선,
네 꽁무니 뒤로 방안의 푸른 고요가
조금 벌어지다 닫힌다 숨소리 낮다
차디찬 방바닥에 반듯이 누워 나,
기다리는 그것은 무엇?

 - 『『골목 하나를 사이로』(창작과비평사, 199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