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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늙은 집/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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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98회 작성일 2025-02-15 20:47:2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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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집/공광규

 머위 등나무꽃, 칡순이 움트며 내려다보는 길이
 가는 실처럼 겨우겨우 물길 따라 이어지는
 척산에서 이 십리 심수 골짜기에
 늙어서 등이 굽은 기와집 한 채가 누워있다
 
 햇빛이 너무 무거워서 내려앉은 마루
 바람이 하도 드나들어 어긋난 문짝
 급한 빗발이 방안을 엿보다가 부러뜨린 문살
 세월의 이빨이 흑벽을 뜯어먹고 있다
 
 토끼똥 노루똥이 수북한 마루 밑에는
 산짐승들이 몇 날 몇 밤 사랑을 나누다 간 다정한 흔적
 썩어 가는 기둥 옆 호로병은 입술이 깨져서
 옛이야기를 한마디도 들려주지 못하겠단다
 
 망가진 샘터에는 미나리가 저 혼자가 크고
 마당을 덮은 풀들이 변소까지 달려가
 푸른 똥을 누고 있는 것을 늙은 감나무만
 옛날 그 자리에서 구부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시간의 망치가 깨뜨리는 기왓장 소리에 놀란
 구렁이는 밤마다 지붕 위에 올라
 햇빛과 바람과 하염없는 물소리를 원망하며
 용마루에 서러움의 길이를 대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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