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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등나무 앞에서/김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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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0회 작성일 2025-05-30 17:25: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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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앞에서/김신용

집 뒤 공터에는
늙은 등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고요의 그늘 짙게 드리우고, 공터의 주인공처럼
서 있다. 한낮의 게으른 슬리퍼를 찍찍 끌며
그늘을 찾아들면, 몸 비틀어 뻗어올린 넝쿨로
그늘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일생의 그늘 하나 짓지 못한
사람은 사절, 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 같다
마지막 힘 다 짜내 무거운 질통을 지고 있는 공사판의
늙은 인부 같기도 한 등나무 앞에 서면
부끄럽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등나무처럼
나 또한 마지막 나체가 되기 위해 선정적인 음률 따라
몸 비비 꼬는 스트립 걸처럼 살아왔다
창조적인 것,
남이 상상도 못할 기막힌 착상의
기상천외한 것, 그런 충격요법을 연기하기 위해
여의도 광장을 질주해 반짝이는 햇살의
바퀴들을 박살내는
그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의처럼 살아왔다
이제 마침표의 잎새들을 매달고 싶다
그럼 나는 잎새 하나의 그늘을 지었는가? 등나무처럼
지친 마음 쉬어갈 넉넉한 빈터를 드리웠는가?
문득 돌아보면 내 그림자, 손톱 같다
파리 한 마리라도 날개를 뜯지 않고서는 보내주지 않겠다고
날을 세운...내 야윈 몸 하나 가리지 못하는...초라한...
넝마 같다. 한때 내 삶의 에너지였던
모독처럼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  『부빈다는 것』(천년의시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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