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김지하 ​ > ㄱ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1,205
어제
1,666
최대
3,544
전체
328,991
  • H
  • HOME

 

[김지하] 엽서/김지하 ​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6회 작성일 2025-05-18 10:08:44 댓글 0

본문

엽서/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 『애린』(실천문학사, 198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