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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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김혜순
아버지가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어머니 저고리에
할아버지 잠방이를
꿰어서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아버지가
가을 한 낮에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낡아빠진 군모에 구멍 뚫린
워카를 꿰어서 녹슨 메달을 메다신다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신다
넓고 넓은 가을 들판에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시고
넝마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황산벌에 계백장군
임하시듯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황산벌에 계백 장군 펄럭인다
장검 대신 깡통 차고 늠름하게 펄럭인다
단칼에 베어버린
처 자식은 논두렁 자갈되어 굴러있고
단칼에 흩어버린
신라 경계는 세월이 지워 버렸는데
계백 장군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 혼자서 흔들린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94)
아버지가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어머니 저고리에
할아버지 잠방이를
꿰어서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아버지가
가을 한 낮에 허수아비를 만드신다
낡아빠진 군모에 구멍 뚫린
워카를 꿰어서 녹슨 메달을 메다신다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신다
넓고 넓은 가을 들판에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시고
넝마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황산벌에 계백장군
임하시듯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황산벌에 계백 장군 펄럭인다
장검 대신 깡통 차고 늠름하게 펄럭인다
단칼에 베어버린
처 자식은 논두렁 자갈되어 굴러있고
단칼에 흩어버린
신라 경계는 세월이 지워 버렸는데
계백 장군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 혼자서 흔들린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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