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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서정저수지/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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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2회 작성일 2025-04-16 11:14: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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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저수지/김태정
  ㅡ 리미에게

그때 우린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지
어둠이 빚어낸 달빛에
삐비풀은 그림자로만 흔들리고
너무 깊이 물소리를 감춰 차라리
텅, 비어 있는 것만 같던 저수지
너의 노래는 낮게 더 낮게
잔잔한 비늘결에 물수제비를 띄우며
어둠 저편으로 가라앉았지
두륜산 어느 암자에 두고 온
네 첫사랑은 알코올중독이라 했겠다
무심코 바람이 불어
달빛 속을 튕겨오르는 은빛 물비늘떼

열다섯 무렵부터 앓게 된 간질은
스물아홉의 풋사랑마저 허락지 않는다며
너는 또 쓸쓸히 웃었던가

하여 너의 사랑은, 깊이 감춰
텅 빈 것만 같은 너의 사랑은
어둠이 가만가만
달빛을 그늘새김하는 꽃살문 저쪽
몰래 취기 어린 사내의
뒹구는 술병 속 공명으로만 사무칠 뿐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너의 사랑만이 아니어서

그때 우리 다만,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던가
달빛이 너와 나 사이
비밀경전처럼 내밀한 경계를 이루고
어둠을 완성하는 너의 침묵과
달빛을 갈망하는 나의 결핍 사이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저수지만이 아니어서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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