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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조숙/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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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53회 작성일 2025-04-06 20:45: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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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김선태

어릴 적 동구 밖에 핀 찔레꽃처럼 보면 하냥 마음이 애지고 막막해지는 계집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는데

마주치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갤 숙이며 지레 먼 논둑길을 도망치다 자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곤 했는데

그런 날은 아니 그 다음날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아예 학교도 작파한 채 산에 숨어 놀다 저물 무렵 기신기신 집으로 기어들곤 했는데

열 살쯤이던가, 촛불을 들고 칠흑 같은 벽장 속에 들어가 종일토록 연필에 침을 묻혀 쓴 편지로나 간신히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인데

무슨 세상에나 가장 어려운 말이라도 적혀 있었던지 졸업가를 부르는 순간까지도 건네지 못하고 결국 손때만 잔뜩 묻은 걸 다시 벽장 깊숙이 감춰버렸던 것인데

사십 년쯤 지났을까,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찔레꽃처럼 마음이 환해지는 것이어서 연어처럼 지난 세월의 강물을 숨차게 거슬러 오르고 싶기도 한 것이어서

- 김선태,『한 사람이 다녀갔다』(천년의시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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