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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비둘기에 대한 예의/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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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01회 작성일 2025-02-07 11:43: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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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에 대한 예의/김기택

차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둘기는 비키지 않았다.
뻔히 타이어를 보면서도 날아갈 기미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가면서 위협했지만
먹이를 향한 순도 높은 집념과
수많은 구두들을 다 비켜가게 했던 배짱이
타이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피와 깃털로 타이어를 더럽힐 수 있는지
물컹거리며 짓뭉개지는 느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기세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차를 피했다가는
먹이에 붙어있는 부리에서 머리통이 우두둑 뜯겨버릴 것 같았다.
뒤차가 빵빵거렸지만
먹이 쪼는 부리는 바닥에 둔 채
몸통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몰아일체와 무아지경을 깨트리고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험을 두둑하게 들어놓고
비둘기 자해공갈단이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볼 것 같아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출처 : 《시인시대》(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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