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감옥/강연호 > ㄱ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767
어제
667
최대
3,544
전체
297,653
  • H
  • HOME

 

[강연호] 길의 감옥/강연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90회 작성일 2025-04-02 00:18:57 댓글 0

본문

길의 감옥/강연호

나 그 길 위에 드난살았다 세월이 지나가고
그 여자도 지나갔지만 그때마다 목젖이 부어올랐다
나 목이 아파 진열장의 마네킹처럼 침묵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세상 안에 있었고 나는 세상 밖에 있었다
그 여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주말이면 소풍 가고
남편과 싸운 뒤에는 더러 친정집에도 다녀갔다
곧 부를 수 없는 날이 올 텐데,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올 텐데
소리내어 그 여자 불러세우고 싶었지만
나 흠씬 두들겨맞은 북어 대가리처럼 입만 벌렸다
물러가라 각성하라 할말 많은 현수막은 부들부들 나부꼈다
언젠가 화살표를 따라간 상갓집에서 잃어버린 신발
아마 망자가 신고 갔으리라, 나 가볍게 포기했지만
두들겨맞은 북어는 언제 바다로 갈까 갈 수는 있는 걸까
나 맨발로 서성이며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았다
나로부터 멀어진 발자국이 미궁에서 놓친 실끝 같았지만
어찌보면 그 여자는 세상 밖에 있었고 나는 세상 안에 있었다
평생을 걸어봐야 제 몸의 창자 길이만큼도 안 되는 길
나 얹혀 지낸 시절의 속쓰림에 그만 빚 갚고 싶었다
하지만 닫힌 길, 문은 밖에서 잠기고 철창은 완강했다

-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중에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