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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깻대를 베는 시간/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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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33회 작성일 2025-03-21 15:57: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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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대를 베는 시간/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낯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은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 시집 <공손한 손> 2009.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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