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했어요/김기택 > ㄱ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93
어제
861
최대
3,544
전체
297,840
  • H
  • HOME

 

[김기택] 깜빡했어요/김기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352회 작성일 2025-03-09 16:42:17 댓글 0

본문

깜빡했어요/김기택

    저런 저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제가 요즘 이렇다니까요. 도대체 뭘 하고 사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어,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미안해요, 통화하느라 깜빡했어요.
    물이 넘치는데도 정수기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전 이런 일이 터질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잠깐만요, 지금 마룻바닥이 흘러내리고 있어요.

    이건 저만 알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요,
    절대로 냄비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곰팡이나 바퀴벌레나 날벌에게 퍼질 수도 있어요.

    이건 당신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지금 닦고 있는 중이니까요.
    냉장고 밑으로 흘러 들어간 말까지 다 닦고 있어요.

    깜빡했어요, 통화 중에는 말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입을 조금만 더 크게 벌려보세요.
    걸레로 닦아야 해요, 이빨 사이랑 사랑니 안쪽까지도요.
    어제 빨아서 입보다는 깨끗해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예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