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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구름 없는 절/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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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54회 작성일 2025-03-09 13:18: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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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없는 절/길상호
 
눈 녹기 시작하자 내 마음이 질척하게 밟히던
그 날, 얼음장의 동맥을 돌던 핏물이 뜨거워져서
심장을 쿵쿵 두드리던 날이었나 봐요
운주사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었지요
세속의 비밀 하나 훔쳐 달아나던 나는
그 하늘 밑에 숨을 곳이 없어 난감했어요
가슴이 두근거려 새어 나오는 체취를 틀어막고
어디 꽃이라도 피었으면 그 향기에 묻히고 싶어도
다른 꽃들은 아직 가지의 중심에 잠들어 있고
일주문 단청만이 꽃잎 안으로 나를 들여보내 주었지요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또 길을 잃었어요
하나의 구원도 이루지 못한 막막한 마음 앞에
늘어선 천불천탑千佛千塔 천 갈래의 길로 얽혀 있었지요
한 굽이 벗어나면 새로운 물음으로 또 막아서는
그 얼굴들 바라보다가 다시 도망치는데 숲 안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는 눈을 감고 누워서도 이미 알고 있던 거예요
내가 훔쳐 달아난 시간의 오랏줄에 묶여
새 세상에 연결되지 못할 인연들을 말이지요
그는 얼굴에 울음도 웃음도 남기지 않고 혼자서
구름 사이로 노 저어 가 버렸지요
독경 소리가 그의 발자국을 뒤따르고 있었지만
한 개의 탑도 쌓지 못한 나는 더 어두워져서
노가 일으키며 간 물결의 흔적 찾을 수 없었지요
절을 나오면서도 하늘은 너무나 맑은 날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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