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에 들다/길상호 > ㄱ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323
어제
861
최대
3,544
전체
298,070
  • H
  • HOME

 

[길상호] 구멍에 들다/길상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428회 작성일 2025-03-07 18:37:17 댓글 0

본문

구멍에 들다/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