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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백설기/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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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22회 작성일 2025-03-01 10:37:1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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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기/김선우

 윗집 앵두나무 아래에서 우리집 지나 꽤나무 밑까지 두들겨 맞으며 그애의 엄마가 쫓겨내려오는 날이면 불괘해진 얼굴로 그애의 아버지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한 달포 평화롭고 서럽게 앵두나무 잎새 간질이는 달이 뜨곤 하였네

 꽤나무 밑에 주저앉아 울던 그애의 엄마가 피터진 입가를 혀로 쓱 훔치며 일어설 때면 확 지펴올린 아궁이 속 삭정이들처럼 꽤나무 밑둥치가 와글와글 뜨거워지곤 했네

 그날은 우리집 안택날이어서 팥시루떡과 백설기 찌는 냄새에 가족이 봉당의 물그릇처럼 오목해진 날이었네

 어스름녘 백설기 나눠담은 접시를 동네에 돌리고 마지막으로 그애네집 올라갔을 때 마당가 앵두나무를 타고 내린 달빛이 고요히 흙을 적시고 두꺼운 나무문 조금 열린 부엌에서 간간이 물소리 차오르고 있었네

 아궁이 가마솥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등 돌려앉은 젊은 엄마의 하얗게 벗은 등에 뜨거운 수건을 대어주는 그애의 작은 손이 보였네

 그애네 집에 아무도 없어 백설기를 전할 수 없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김 오르는 희디흰 네모난 것을 미어지게 먹은 나는 급체를 앓았네 바늘로 딴 하얀 손가락 끝에서 스며나온 자줏빛 핏방울이 무서웠네

 시루 하나 가득 김구멍마다 숭숭 숨을 뱉던 백설기

 희고 네모난 그 속내엔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시끄러운 한낮이 있을 것 같고

 고깃배가 돌아오는 달포마다 온동네가 고등어 등처럼 퍼릇퍼릇해지는 우울한 축제가 있을 것 같고

 또 뭔가 시루 하나 가득 뜨겁게 쪄내리던 붉은 상처 자국이 있을 것도 같은,

 가족에게 백설기 한조각씩 돌아가면 시루는 이제 뜨거운 숨구멍 하나둘 닫고 밤별들의 난망함 속으로 들어가네

 우물 속 물바가지가 밤새 우물벽을 치닫는 소리

 가지꽃 보라색 슬픈 낯빛이 희디흰 재처럼 식어가고 아린 잎사귀 뒤에 숨어 어린 꽤들이 서둘러 익어갔네

- 도화 아래 잠들다, 2003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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