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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례의 시

 

주전자 속으로 내리는 비-조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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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67회 작성일 2021-11-17 12:53:3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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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 속으로 내리는 비
  조성례

태양이 잘 경작한 허공을 이 밤, 누군가 적시고 있다.
잔소리처럼 끊임없이 청각의 텃밭으로 꽂혀드는 저 소리의 송곳들,
단잠에 들었던 내 귀의 둑이 간헐적으로 헐리자, 적막이 조금씩 유실되기 시작한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한밤의 빗소리, 창밖에서 누군가 슬피 울고 있다.
그칠 줄 모르는 울음소리에 내 고요한 잠이 눅눅해지고 이내 나도 젖는다.

비가 내리면,
파문처럼 레코드판처럼 회전하며 들려오는 젖은 소리들
오래전 선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사내가 흥얼거리던 목로주점 한 소절과
연탄 화덕 앞에 앉아 닭똥집을 구워 먹으며 주고받던 낯익은 고백들이 번진다.
매캐하고 독한 연탄가스처럼
그 시절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중독을 선사했던
화장이 진한 K의 골절된 사랑과 여인숙의 이별도 빗속에서 시작되곤 했다.

이 밤, 오래전 소식이 끊겼던 그녀가 돌아왔는지 한밤중에 비는 내리고
그날 밤 여인숙에서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는 그 사연도
알고 보면 비 때문이었다던 술 취한 그녀의 벌개 진 변명처럼
내 머리맡의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저 여인, 난데없이 돌아와 내가 잠든 거실 창문을 밤새 두드린다.
이 밤의 늑골을 모두 적시고
내 폐경의 날들까지 뜬눈으로 망쳐놓고도 갈 생각을 않는 저 여인
나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넋두리를 귀로 받아 적는다.
문득 체온 속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졸린 스웨터로 애써 단속하며
가스레인지 위에 차 주전자를 올려놓고 불을 켜는데
반쯤 물이 채워진 주전자 좁은 그 안에도 자글자글, 비가 내린다.

  <2018 가을호 시산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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